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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 62주년을 보내며..
     | 2012·06·26 01:12 |
      한국 전쟁 당시 이름도 모르는 동방의 작은 나라를 도우러 온
      UN군에 대한 고마움이 날이 갈수록 절절해 집니다.
      3년 전 조선일보에 났던 가슴 뭉클한 기사를 간추려 올리며 이 날을 보냅니다.



    한국전쟁에 함께 참전했던 미군 ‘장군과 아들’ 3부자의 숨겨진 이야기들

    27일은 한국정전  56주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 상·하원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희생한 미군들을 기리기 위해 이날 조기(弔旗)를 게양키로 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도 이날을 ‘한국전 참전용사 휴전일’로 지정해
    연방정부의 모든 기관에 성조기를 조기로 게양토록 지시했다.
    한국전쟁 도중 한반도로 건너와 전장(戰場)의 생사기로에서 운명이 엇갈린 미군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뒤로 하고 먼저 떠난 경우도 있고, 아버지가 아들을 앞세워 보내고
    정전협정 뒤 홀로 그 아들의 어머니에게 돌아간 경우도 있다.

    ▲ 아버지, 아들을 남기고 떠나다 - 워커 부자

    우락부락한 외모 때문에 ‘불도그’ 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월튼 워커 사령관.
    1950년 성탄절을 이틀 앞둔 날, 미 제24사단에 이승만 대통령을 대신해 부대 표창을 전하고
    승리의 주역인 아들 샘 워커 대위에게 미국 정부의 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경기도 양주군(현 서울 도봉구 도봉동 596-5)에서 한국군 트럭에 부딪혀 전사했다.
    며칠 전 대장 진급이 상신된 지도 모른 채.

    이틀 후, 도쿄의 UN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아들 샘 워커 대위를 불러 말했다.
    “귀관에게 고 월튼 워커 대장의 유해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임무를 맡긴다.”
    워커 대위는 슬픔을 꾹 누르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저는 일선 보병 중대장입니다.
    부하들이 심각한 위험에 노출돼 있으니 그럴 수 없습니다. 의전부대에 맡겨주십시오.”  
    그러나 맥아더는 낮은 목소리로 “명령이다” 라는 한 마디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결국 워커 대위는 아버지의 유해를 가슴에 안고 한국 땅을 떠났다.
    훗날 그도 대장이 되어 미군 최초의 부자 대장(父子 大將)이라는 진기록을 남겼다.
    차기 육군참모총장으로 유력하던 대장 재직 중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입장에 반대하다
    예편되어 한국과의 질긴 인연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지난 1980년 한국전쟁 발발 30주년 특집방송(TBC)에 출연해
    아버지를 잃은 한반도에 더 큰 아쉬움을 남기고 떠났음을 밝혔다.
    “당시엔 명령이라서 어쩔 수 없이 따랐지만 군인이 부하를 남기고 먼저 전장을 떠나왔다는 생각이
    지금도 가슴을 무겁게 합니다.”

    '워커힐'이란 이들 부자 대장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 아들, 아버지를 남기고 떠나다 - 밴플리트 부자

    6.25 전쟁 중인 1951년 4월, 제임스 밴플리트 중장은 월튼 워커, 매튜 리지웨이 장군의 뒤를 이어
    미8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의 아들 짐 밴플리트 역시 공군 중위로 한국전쟁에 참여했다.
    그리스에서의 근무를 막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한국에 참전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아버지가 사령관으로 싸우고 있는 한반도 출격을 자원했다.

    1952년 4월 4일 새벽 1시5분, 그는 압록강 남쪽 평북 순천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2시간 후 김포비행단 레이더와의 접촉을 마지막으로 소식이 두절됐다.
    아침 10시 30분, 밴플리트 사령관은 미 제5공군 사령관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아들이 실종돼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사령관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지시했다.
    “짐 밴플리트 중위에 대한 수색작업을 즉시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무모하다.”
    아버지가 아들 구출작전을 중지시킨 것이다.

    며칠 후 부활절을 맞아 그는 전선에서 실종된 미군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한국)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미 8군사령관으로서 한미재단을 설립하고, 한국 육군사관학교 재건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그는
    귀국과 함께 대장으로 예편해 1992년 10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후 재건 및 한미 우호증진에 온힘을 쏟았다.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한미 우호협력단체 ‘코리아소사이어티’는
    1992년 ‘밴플리트상’을 제정해 한미관계 증진에 공헌한 양국 국민을 선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 지도자의 자질  - 아이젠하워 부자

    1952년 12월, 미국 대통령 당선자이자 제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상륙작전의 영웅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 방한, 미 8군사령부를 찾았다.
    8군 및 한국군 고위 장성들이 대거 참석하고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밴플리트 사령관이 전선 현황에 대해 브리핑 했다.

    브리핑이 끝나자 조용히 듣고 있던 아이젠하워 장군이 뜬금없는 질문을 하였다.
    “사령관, 내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 안 있어 대통령에 취임할 당선자의 첫 질문 치고는 너무나 사적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아들을 적지에 보내 잃어버리고 미동도 하지 않았던 밴플리트 장군 아니던가.
    모두들 무슨 일이 일어날까봐 바짝 긴장했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전방 미 3사단 정보처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밴플리트 장군이 사무적으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이어진 아이젠하워 장군의 부탁은 참석자 모두를 놀라게 했다.
    “사령관, 내 아들을 후방 부대로 배치시켜 주시오.”
    참석자들은 서로 바라보며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밴플리트 장군 역시 아이젠하워 장군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이 혹시 전투 중에 전사한다면 슬픈 일이 되겠지만
    그것을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일 것이오. 그러나 만약 아들이 포로가 된다면 적군은 분명히
    미국 대통령의 아들을 가지고 미국과 흥정을 하려 들 것이오.
    그러면 국민들은 ‘대통령의 아들을 구하라’고 외치며 정부에 적군의 요구를 들어주라는 압력을 가할 것이오.
    나는 그런 사태를 원치 않소. 그래서 내 아들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즉시 조치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이오.”
    “즉각 조치하겠습니다. 각하!” 밴플리트 장군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장내에는 참석자들의 탄성이 울려 퍼졌다.

                                                ********************

    1980년 한국전쟁 발발 30주년 특별기획을 제작하면서 위 주인공들을 직접 인터뷰 했던
    이정웅(66, 前 KBS 편성실장)씨는 “한국전쟁에 142명의 미군 장성 아들들이 참전해
    이 중 35명이 사망했다” 면서 “하물며 적군이었던 마오쩌둥 역시 참전한 아들을 잃고도
    그 시체를 다른 중공군 전사자들과 똑같이 한반도에 묻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승에서 부자의 연을 다한 워커, 밴플리트 장군 이야기 모두 교훈을 주지만,
    우리를 정말 돌아보게 만드는 것은 아이젠하워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지도자 자녀의 비리만 봤지, 전사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우리 국민들은
    '전방에서 아들을 빼라'는 아이젠하워의 깊은 뜻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 야말로
    이들이 폐허가 된 한반도에 남기고 간 가장 귀한 교훈입니다.”
최성자 ‘노블레스 오블리주’ , 이 말을 몸소 실천하는 국민들이 사는 나라가 바로 선진국,
무척 부럽습니다. 헌데 우리 나라는......

12·06·26 10:51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즉시 열린 안정보장이사회에서 한국파병이 쉽게 의결된 것은
소련이 '제 발 재려' 불참했기 때문에 거부권 행사를 할 수 없었던 덕이라는데
그것이 우리에겐 더 없는 행운이었다고만 늘 생각해왔지요.

그런데 2년 전 빅토리아 섬을 방문했을 때 주 청사 건물의 넓은 광장 한 쪽에 서 있는
Douglas 탑(1, 2차 세계대전에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군인들을 추모하는 탑)
에 색여진 '우리들의 영광스러운 전사자들에게' 란 글귀 아래, 훗날 덧붙여진
Korea 1950~1953 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 졌어요.

해마다 6월이면 6.25의 슬픈 기억에 더하여
'낯설고 물설은, 먼 이국 땅에 와서 산화한 내 아이같은 병사들' 이
실감으로 다가와 가슴이 아파지네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도와주신 여러분!

'언젠가는 우리도 선진국 대열에...!' 비는 마음입니다.

12·06·26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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