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의 집을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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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의 하얀 집
     | 2021·05·16 17:39 |
다시 한번 지어보는 구름 위의 하얀집 (홈페이지를 열며..2001. 07. 01 )
수안         | 2001·07·01 22:12 |
  
지금으로부터 10 년 전인 1992년
우리는 20년 가까이 살아온 정든 집과 헤어져야했습니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이었습니다.

그 집은
작은 산등성에 있으면서
반듯하지도 편편하지도 않아 끝까지 남아있다가
우리와 인연이 닿아 헐값으로 살 수 있었던
두 필지의 넓은 대지 위에다 지은
작으마한 집이었습니다.

그 집을 짓고
우리 네 식구는
서툴지만 부지런한 정원사가 되었습니다.
턱이 진 경계선을 헐어서 언덕을 만들고
잔디 씨를 구해다가 넓은 뜰에 뿌려주고
가느다란 100원 짜리 묘목을 여기저기 꽂아준 것도
모두 우리 손으로 였습니다.

그 집은
여름이 되자
거칠던 흙바닥이 거짓말 같이 파란 잔디로 덮였고
회초리 묘목에선 새싹도 터져 나왔습니다.
생명의 신비에 감탄하면서
우린 자꾸 자꾸 욕심을 내어갔습니다.

이름 없는 조각가의 팔리지 않는 작품의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아래 마당에다 작은 연못을 팠습니다.
잉어를 구해다 놀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욕이었나 봅니다.

몇 해에 걸쳐
아름다운 꿈을 한것 심어놓은
그 집에서 우리는
엄청난 불행을 맞아야 했습니다.
졸지에 큰 주인을 잃은 우리의 보금자리는
한 순간에 영롱했던 빛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재색의 정원에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정신을 차려 둘러보니
돌보지도 가꾸지도 않은
그 집에서도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 만큼 아이들은 자라 있었고
무심한 뜰은 빛을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언덕 위의 하얀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큰 아이의 친구와 선후배들,
그들의 여자 친구들과 또 그 친구들,
학교가 가까운 탓에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서는
함께 먹고 study(study group이 유행하던 때였지요)하고
토론에 열을 올리기도 하고
때론 붓글씨까지 함께 쓰던 작은 아이 친구들,
그리고 조카들 생각해서 찾아와 함께 살아준
배려 깊은 망내 시동생인 '꼬마 삼촌'과 그 지인들로 해서
그 집은 늘 북적이면서 그런대로 활기를 되찾아 갔습니다.

사회학 전공의 78학번인 큰 아들
정치학을 전공한 82학번 작은 아들이
그 혼란했던 세월 속을 누비며
두 위험한(??) 학과를 무사히(?) 졸업한 것도
그 집에서였습니다.

그 집에 사는 동안 우리는
착하고 아리따운 큰 며느리를 새 식구를 맞았고
귀여운 첫 손자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진작부터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 집을 처분해야 할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그리고
슬픔과 기쁨을 함께 안겨주었던
그집이 그러나 상품가치는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높은 언덕 위의, 반듯하지도 않은 넓기만 한 땅덩어리
그 크기에 비해 고지식하게도
50평 미만으로 지어놓은 작은 건평의
그 집은 투자가치가 전혀 없어
탐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드디어 벼랑 끝으로 몰리는 날이 왔습니다.
대지가 150평이 넘는 다는 이유만으로 호화주택 소유주가 된 우리에게,
한 번 내는 세금액이 우리의 통장 잔고액을 초과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안타까움과 조바심과 절망으로 뛰어다니기를 2년 가까이,
우리는 드디어 주위분들의 도움을 받으며 겨우겨우
나라에다 팔기로 결말을 보았습니다.
새로운 세금제도가 실행되기 석달 전의 일입니다.
토지개발공사가 제시한 조건 한가지는
집을 헐어 토지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애석함도 뒷전이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감사의 마음을 애써 부풀렸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씩 심었고,
커지는 족족 옮겨 심기를 반복한 회초리들은
18년이란 세월 동안에 어느새 거목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작은 키의 꽃나무들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파다가 심어도 살아낼 것 같은 큰 나무 열 구루는
마침 개포동으로 옮겨 앉은
모교 교정을 새 삶의 터전으로 정해주었습니다.
서부해당화나 마로니에, 후박들과 같이
지나치게(?) 자라버려 인연이 다한이  나무들과는
그대로 가슴 아픈 이별을 고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20년 가까이 살아온 살아온
언덕위의 하얀집을
대지의 품으로 떠나 보냈습니다.

그 집에서의 기억들을
꽁꽁 싸서 가슴 깊은 곳에 묻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상도동 쪽을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 집 이야기를 화제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배려였는지도 모릅니다.
손자 녀석만이, 신기하게도
만 세살 때 까지의 몇 가지 선명한 추억을 가지고 있어
주택에서 다시 살고 싶다고 가끔씩 그곳을 그리워했을 뿐입니다.

모교에 들를 때면 나는 천천히 교정을 한 바퀴 돌며
그곳에 뿌리 내린 나무들과 인사를 나누곤 했습니다.
매화관 앞뜰에서 잘 자라고 있는 홍매는 내가 특히 아끼던 나무로
가을이면 풍성한 열매로 나를 반겨주었습니다.
몇 알 따서는 손바닥에서 굴리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십년이란 세월이 또 흘렀고 21세기의 새 밀레니엄을 맞았습니다.

*******

Homepage의 배경을 무엇으로 잡을까 궁리하면서
지난 날의 사진들을 들척이다가
오랜 만에 언덕 위의 하얀집과 만났습니다.
세월의 흐름 따라 아름다운 건망증(이해인 수녀님 말씀) 속으로
묻어버린 상처들을 다시 건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과
쌓인 먼지를 털어내어 인연이 있는 모두에게
보이고 싶은 욕심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드디어 하얀집을
다시 한번 지어보기로 했습니다.
밝은 햇볕에 들어내 놓고 바람도 쏘이게 하면서
가끔씩 추억하며 살아가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모습을 복원해 보고 싶습니다.
아직 익숙치 못한 사진 합성이나 수정 기술도 동원하겠습니다.
새 단장한 하얀집이 완성되면 이번에는 구름 위에다 띄우렵니다.

바람따라 떠도는 구름과 함께 이곳 저곳 흘러 다니다 보면
우리에겐 그토록 아름다웠던
언덕 위의 하얀집의 우거진 푸르름을
미쳐 못 보고 먼저 가신 분들.
그 집을 드나들며 즐겼던 수 많은 그 시절의 젊은이들,
그리고 그곳에 살았기에 아프고 또 즐거웠던 가족들과
그 후에 한 식구가 되어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 눈에도 띄어
아쉬움도 달래주고 옛 이야기도 나눌 수 있으리라는
꿈을 얹어서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당시 우리의 긴박했던 사정으로 해서
정든 집을 대지로 돌려보내면서도 작별의 애석함도 나누지 못하고
"참 잘 됐지요"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던 우리의 매정함에 용서를 빌면서
구름 위에 지어보는 하얀집을
살아져간 언덕 위의 하얀집에게 보내는 진혼가로 삼으렵니다.

순간 순간 옛 생각에 빠져
집 짓는 일이 더디어지는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름답게 다듬어지지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풀꽃 몇 포기 심고 있습니다.

* 2001 년, 녹원의 구름 위에다 하얀집을 다시 지으며... *

나무잎이 무성한 거목으로 자란 마로니에에는
오늘도 노란새가 날아와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요?

******************

처음으로 만들어본 Homepage 대문입니다.
다시 한번 지어보는 구름 위의 하얀집입니다 (홈페이지를 열며.. 2001. 07. 01 )
            | 2012·11·25 19:42 |
  


지금으로부터 10 년 전인 1992년
우리는 20년 가까이 살아온 정든 집과 헤어져야했습니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이었습니다.

그 집은
낮은 산등성에 있으면서
반듯하지도 편편하지도 않아 끝까지 남아있다가
우리와 인연이 닿아 헐값으로 살 수 있었던
두 필지의 넓은 대지 위에다 지은
아주 작으마한 집이었습니다.

그 집을 짓고
우리 네 식구는
서툴지만 부지런한 정원사가 되었습니다.
턱이 진 경계선을 헐어서 언덕을 만들고
잔디 씨를 구해다가 넓은 뜰에 뿌려주고
가느다란 100원 짜리 묘목을 여기저기 꽂아준 것도
모두 우리 손으로 였습니다.

그 집은
여름이 되자
거칠던 흙바닥이 거짓말 같이 파란 잔디로 덮였고
회초리 묘목에선 새싹도 터져 나왔습니다.
생명의 신비에 감탄하면서
우린 자꾸 자꾸 욕심을 내어갔습니다.

이름 없는 조각가의 팔리지 않는 작품의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아래 마당에다 작은 연못을 팠습니다.
잉어를 구해다 놀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욕이었나 봅니다.

몇 해에 걸쳐
아름다운 꿈을 한 것 심어놓은
그 집에서 우리는
엄청난 불행을 맞아야 했습니다.
졸지에 큰 주인을 잃은 우리의 보금자리는
한 순간에 영롱했던 빛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재색의 정원에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정신을 차려 둘러보니
돌보지도 가꾸지도 않은
그 집에서도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 만큼 아이들은 자라 있었고
무심한 뜰은 빛을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언덕 위의 하얀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큰 아이의 친구와 선후배들,
그들의 여자 친구들과 또 그 친구들,
학교가 가까운 탓에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서는
함께 먹고 study(study group이 유행하던 때였지요)하고
토론에 열을 올리기도 하고
때론 붓글씨까지 함께 쓰던 작은 아이 친구들,
그리고 조카들 생각해서 찾아와 함께 살아준
배려 깊은 망내 시동생인 '꼬마 삼촌'과 그 지인들로 해서
그 집은 늘 북적이면서 그런대로 활기를 되찾아 갔습니다.

사회학 전공의 78학번인 큰 아들
정치학을 전공한 82학번 작은 아들이
그 혼란했던 세월 속을 누비며
두 위험한(??) 학과를 무사히(?) 졸업한 것도
그 집에서였습니다.

그 집에 사는 동안 우리는
착하고 아리따운 큰 며느리를 새 식구를 맞았고
귀여운 첫 손자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진작부터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 집을 처분해야 할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슬픔과 기쁨을 안겨주었던
그집이 그러나
상품가치는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작은 언덕 위의, 반듯하지도 않은 넓기만 한 땅덩어리
그 크기에 비해 고지식하게도
50평 미만으로 지어놓은 작은 건평의
그 집은 투자가치가 전혀 없어
탐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드디어 벼랑 끝으로 몰리는 날이 왔습니다.
대지가 150평이 넘는 다는 이유만으로 호화주택 소유주가 된 우리에게,
한 번 내는 세금액이 우리의 통장 잔고액을 초과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안타까움과 조바심과 절망으로 뛰어다니기를 2년 가까이,
우리는 드디어 주위 분들의 도움을 받으며 겨우겨우
나라에다 팔기로 결말을 보았습니다.
새로운 세금제도가 실행되기 석달 전의 일입니다.
토지개발공사가 제시한 조건 한가지는
집을 헐어 토지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애석함도 뒷전이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감사의 마음을 애써 부풀렸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씩 심었고,
커지는 족족 옮기기를 반복한 회초리들은
18년이란 세월 동안에 어느새 거목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작은 키의 꽃나무들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파다가 심어도 살아낼 것 같은 큰 나무 열 구루는
마침 개포동으로 옮겨 앉은
모교 교정을 새 삶의 터전으로 정해주었습니다.
서부해당화나 마로니에, 후박들과 같이
지나치게(?) 자라버린 나무들과는
그대로 가슴 아픈 이별을 고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20년 가까이 살아온
언덕위의 하얀집을
대지의 품으로 떠나 보냈습니다.

그 집에서의 기억들을
꽁꽁 싸서 가슴 깊은 곳에 묻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상도동 쪽을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 집 이야기를 화제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배려였는지도 모릅니다.
손자 녀석만이, 신기하게도
만 세살 때 까지의 몇 가지 선명한 추억을 가지고 있어
주택에서 다시 살고 싶다고 가끔씩 그곳을 그리워했을 뿐입니다.

모교에 들를 때면 나는 천천히 교정을 한 바퀴 돌며
그곳에 뿌리 내린 나무들과 인사를 나누곤 했습니다.
매화관 앞뜰에서 잘 자라고 있는 홍매는 내가 특히 아끼던 나무로
가을이면 풍성한 열매로 나를 반겨주었습니다.
몇 알 따서는 손바닥에서 굴리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십년이란 세월이 또 흘렀고 21세기의 새 밀레니엄을 맞았습니다.

*******

Homepage의 배경을 무엇으로 잡을까 궁리하면서
지난 날의 사진들을 들척이다가
오랜 만에 언덕 위의 하얀집과 만났습니다.
세월의 흐름 따라 아름다운 건망증(이해인 수녀님 말씀) 속으로
묻어버린 상처들을 다시 건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과
쌓인 먼지를 털어내어 인연이 있는 모두에게
보이고 싶은 욕심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드디어 하얀집을
다시 한번 지어보기로 했습니다.
밝은 햇볕에 들어내 놓고 바람도 쏘이게 하면서
가끔씩 추억하며 살아가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모습을 복원해 보고 싶습니다.
아직 익숙치 못한 사진 합성이나 수정 기술도 동원하겠습니다.
새 단장한 하얀집이 완성되면 이번에는 구름 위에다 띄우렵니다.

바람따라 떠도는 구름과 함께 이곳 저곳 흘러 다니다 보면
우리에겐 그토록 아름다웠던
언덕 위의 하얀집의 우거진 푸르름을
미쳐 못 보고 먼저 가신 분들.
그 집을 드나들며 즐겼던 수 많은 그 시절의 젊은이들,
그리고 그곳에 살았기에 아프고 또 즐거웠던 가족들과
그 후에 한 식구가 되어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 눈에도 띄어
아쉬움도 달래주고 옛 이야기도 나눌 수 있으리라는
꿈을 얹어서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당시 우리의 긴박했던 사정으로 해서
정든 집을 대지로 돌려보내면서도 작별의 애석함도 나누지 못하고
"참 잘 됐지요"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던 우리의 매정함에 용서를 빌면서
구름 위에 지어보는 하얀집을
사라져 간 언덕 위의 하얀집에게 보내는 진혼가로 삼으렵니다.

순간 순간 옛 생각에 빠져
집 짓는 일이 더뎌지는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름답게 다듬어지지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풀꽃 몇 포기 심고 있습니다.

* 2001 년, 녹원의 구름 위에다 하얀집을 다시 지으며... *



나무잎이 무성한 거목으로 자란 마로니에에는
오늘도 노란새가 날아와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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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처음으로 만들어본 Homepage 대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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